
당신의 정보가 유출돼도 가해자는 ‘무죄’일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신의 가장 사적인 사진과 정보가 동의 없이 세상에 퍼졌는데, 법원이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한다면?”
믿기 어려운 이 가정은, 안타깝게도 2025년 대한민국 법원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최근 대법원(2025도7058 판결)은 성범죄 피해자의 신상정보를 유포한 가해자의 특정 혐의에 대해 무죄를 확정했습니다. 이 판결은 단순히 한 사건의 결론을 넘어, 현재 법체계가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를 어떻게 보호하고 있으며 그 한계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 한계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바로미터입니다.
이 글에서는 이 충격적인 판결의 이면을 Q&A 형식으로 파헤쳐, 법의 논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피해자가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결정적 조치’는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Q1. 대체 어떤 사건이었기에 이런 판결이 나온 건가요?
사건의 내막은 참담합니다. 가해자 A는 전 연인 B씨의 사적인 사진과 영상을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관계가 끝난 후, A는 이 영상과 사진을 B씨의 이름, 직업, 연락처 등 구체적인 신상정보와 함께 텔레그램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유포하는 끔찍한 ‘2차 가해’를 저질렀습니다.
검찰은 A를 불법 촬영물 유포 혐의 등과 함께, 성폭력처벌법이 금지하는 ‘피해자 신상정보 공개’ 혐의로도 기소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다른 혐의는 유죄로 인정하면서도, 바로 이 ‘신상정보 공개’ 혐의에 대해서는 1심부터 대법원까지 일관되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Q2. 명백한 2차 가해인데, 왜 ‘신상정보 공개’는 무죄가 된 건가요?
결론부터 말하면, ‘타이밍’ 문제였습니다. 법원의 논리를 이해하려면, 이 상황을 ‘응급실’에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성폭력처벌법 제24조 제2항은 ‘성폭력 피해자의 신상정보 유출 금지’라는 중요한 수술 도구입니다. 하지만 법은 이 도구를 **’응급실에 접수된 환자’**에게만 사용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응급실에 접수’하는 행위가 바로 **’수사기관에 사건을 신고하여 공식적인 수사가 개시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사건에서 B씨는 아직 경찰에 신고하기 전, 즉 ‘응급실에 접수’되기 전에 신상정보가 유출되었습니다. 비록 B씨가 끔찍한 피해를 입은 ‘환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아직 시스템에 등록되지 않았기에 법원은 ‘신상정보 유출 금지’라는 수술 도구를 쓸 수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는 ‘법률이 없으면 처벌도 없다’는 ‘죄형법정주의’ 원칙을 매우 엄격하게 적용한 결과입니다. 법에 명시된 ‘수사나 재판이 진행 중인 피해자’라는 문구를 그 이상으로 확대해석할 수 없다는 것이죠.
Q3. 그렇다면 이 판결은 피해자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나요?
이 판결은 피해자에게 매우 냉정하지만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바로 **”법의 보호를 원한다면, 망설이지 말고 즉시 시스템 안으로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많은 피해자들이 충격과 두려움, 혹은 가해자의 회유 때문에 신고를 망설입니다. 하지만 그 망설이는 시간 동안, 2차 가해로부터 당신을 보호해 줄 가장 강력한 법적 방패막 중 하나가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이 판결은 명백히 보여줍니다.
[미리 예방하는 체크리스트: 피해 발생 시 행동 강령]
- 즉시 증거 수집: 유포된 게시물, 대화 내용 등 화면을 캡처하고 URL을 저장하는 등 모든 증거를 즉시 확보해야 합니다.
- 신속한 법률 상담: 혼자 고민하지 말고 즉시 형사 전문 변호사와 상담하여 사건의 방향을 정해야 합니다.
- 지체 없는 고소: 변호사의 조력을 받아 최대한 신속하게 경찰에 고소장을 제출하여 공식적인 수사를 개시해야 합니다. 바로 이 시점부터 당신은 법의 완전한 보호 대상이 됩니다.
Q4. 이런 법의 ‘빈틈’, 개선될 수는 없나요?
물론입니다. 이번 판결은 현행법의 한계를 명확히 드러냈습니다. 아동·청소년성보호법의 경우, 수사 개시 여부와 관계없이 ‘피해아동·청소년’의 신상 공개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폭력처벌법 또한 보호의 대상을 ‘모든 성폭력 피해자’로 확대하는 입법적 논의가 시급히 필요합니다.
하지만 법 개정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문제입니다. 당장 고통받고 있는 피해자에게 “법이 바뀔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주어진 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신을 지킬 최선의 방법을 찾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대응입니다.
결론: 법은 문을 두드리는 자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2025도7058 판결은 법이 때로는 일반인의 상식이나 감정과 다른 궤도에서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절차’와 ‘원칙’이라는 중요한 뼈대가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뼈대를 이해하고, 가장 빠르고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는 결코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피해 사실을 인지한 즉시, 두려움을 떨치고 법의 문을 두드리는 용기입니다. 신속한 법적 대응만이 추가 피해의 확산을 막고, 가해자에게 합당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임을 이번 판결은 우리에게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